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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 조회 2183 | 2019-02-08 13:46
배움은 나와 세계를 인식하는 창조적 능동태
이천 십 구년. 올해도 여지없이 새해가 떴다. 어제도 떴던 해가 오늘 새로이 뜬다. 매일 뜨는 해지만 내일은 다시 내일의 해가 떠오른다. 새해가 되면 왠지 무언가 해야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자기계발이든 건강을 위해 걷기나 자전거 타기 등 무언가를 배우고 싶다.
‘배운다’. 무엇을 배우고 왜 배우려고 하는지, 배우기 이전에 배움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21세기 문맹은 읽고 못하고 쓰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배우고 잊어버리고 다시 배우는 능력이 없는 사람이다. 21세기 들어 많이 회자 되는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의 말이다.
배움은 learn, unleran, relearn의 관계이다. 배우고 잊고 다시 배우기의 관계에 놓여있다. 배움은 이 세 개의 관계를 잘 이해해야 한다. 또 하나. 배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학과 습의 관계를 알아야 한다. 유학의 영향으로 인해 동아시아는 “학”만큼 강력한 기제가 없었다. 지금의 교육열은 그에 기반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가체제나 국가운영에 있어서 배움(學)만큼 강력한 기제는 없다. 국학의 정신적 기반인 사서 중 논어의 첫 구절은 ‘학(學)’이다. 學而時習之不亦說乎(학이시습지 불역열호)『논어』 「학이學而편」, “배워 때에 맞추어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도올 한글역주 247쪽) 학學은 논어의 첫 단어이다. 이 구절은 보통 이렇게 해석한다. “때때로 배우고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논어의 첫 구절에 배움과 벗을 배치했다. 그만큼 중요했으니 논어의 편집자가 그렇게 배치하였을 것이다.
논어의 첫 구절은 많이 쓰이면서 가장 많은 논란이 있는 구절이다. 문제의 단어는 ‘時’이다. 보통 ‘때때로’라고 번역하지만 때때로 번역하면 시도 때도 없이 공부하라는 말이다. 아침에 일어나 공부하고 밥 먹고 공부하고, 학교에 가서 공부하고 도서실에 가서 예습, 복습하는 것이 배움일까하는 의구심이 든다.
공자가 살던 시대는 지금과 같은 학교나 근대교육이 아니었을 것이다. 공자 학단 내에서 공자와 제자들 간에 이루어진 배움일 것이다. ‘시時’를 때때로 해석하면 끊임없이 복습하고 배워야한다는 것이다. ‘때에 맞추어’로 해석하면 배움의 시기를 중요해진다. 여기에서 ‘시’란 “때때로(occasionally)”의 뜻보다는 “때에 맞추어(timely)”라고 읽어야 맥락이 통한다. 그래야 정말 필요한 공부나 시기적절한 배움을 해야 하고 그게 자기의 진정한 공부가 되는 것이다.
공자가 살 던 시대는 춘추전국시대이다. 이 시대의 '학'은 신분상승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공자는 이 시대에 이미 배움 자체의 즐거움을 이야기한다.
또 하나의 문제의식은 '습'이다. ‘습’은 익힌다는 뜻이고, 습은 그냥 습관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학과 습은 엄연히 다른 영역이다. 습은 어린 새의 날개짓을 형상화한 글자다. 새는 태어나면서부터 날지 못한다. 수많은 날개짓을 연습한 후에야 비로소 날 수 있다. 습은 애절한 날개짓의 연습이며 우리가 보는 우아한 날개짓이 아니다. 날개짓은 연습이자 실천이다. 결국 ‘습’은 실천의 세계이다. 배움은 실천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배움 그 자체로 배움일 수 없고 실천이 담보되지 않는 배움은 배움이 아니라는 것이다. 배움과 실천의 관계는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핵심이기도 하다.
배움은 능동적으로 세계와 창조적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이다(시민교육 4호, 3쪽). 배움은 나와 세계를 인식해 나아가는 지난한 창조적 과정이다. 단순히 배움을 앎으로 접근하여 지식을 쌓는 다면 창조적 관계를 형성되지 않는다. 배우려고 하는 자체가 능동적이다. 배움은 삶의 과정으로 가는 능동태이다.
글 오충렬 (전주시평생학습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