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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 조회 1957 | 2019-04-26 22:07
곡고화과(曲高和寡)
곡조가 높으면 화답(和答)하는 사람이 적다. 중국 양(梁)나라 소통(蕭統)이 엮은 문장 선집인 ‘문선(文選)’의 ‘송옥 대초왕문(宋玉 對楚王問)’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楚末(초말) 굴원의 제자로서 대표적인 남방 시인으로 손꼽히던 송옥(宋玉)의 문장은 꽤 유명했다. 그러나 문장이 어려워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어 글을 읽는 사람도 드물자 초왕(楚王)이 송옥에게 그런 사실을 비꼬듯 물어보았다.
“대체 무엇 때문에 경의 문장을 읽는 사람이 드문 거요?” 송옥은 비유를 들어 말했다. “어떤 가수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길에서 노래를 부르는데, 하리파인이란 아주 쉬운 통속노래를 불렀습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대부분 알아듣고 따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양아해로라는 노래를 부르자 화답하는 사람이 수백 명으로 줄었습니다.
양춘백설(陽春白雪)이란 노래를 하자 나라 안에서 화답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봉황은 창천(蒼天)을 등에 지고 구름 위에 노는 데 동네 참새가 어찌 하늘 높은 줄을 알며, 곤(鯤)이라는 대어(大魚)를 어항 속 붕어가 어찌 알겠습니까?
초나라 왕은 송옥의 말을 듣고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고상한 예술이 대중의 선택을 받지 못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겠지만 대중성보다는 예술성을 선택한 송옥의 뚝심이 빛을 발한다.
간혹 둘을 갖고 제대로 된 조화를 이루는 경우도 더러 있기는 하다. 그러나 대중의 기호나 시류에 휩쓸리기보다는 자신의 색깔을 내면서 일관성 있는 작품 활동을 해가는 뚝심이 중요하지 않은가.
시류(時流)란 글자 그대로 한순간에 사라지는 불꽃과도 같은 것이기에 그것보다는 자신의 영혼을 담아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불후의 명작을 남겨야 하지 않겠는가?
글 然由 최진식(동방문화진흥히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