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칼럼> 추석과 성묘의 기원 | 문화
관리자 | 조회 1762 | 2019-09-09 20:13
‘항상 한가위만 같아라’
사진출처 픽사베이
추석의 기원은 달을 기념하는 달의 축제에서 기원했다. 고대 사회에서 밤은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다. 어두운 밤이면 전쟁 시에는 적의 습격이 있었고, 일상생활에서는 밤에 도적의 습격이나 맹수의 습격 등이 있었기에 밤은 언제나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또한 노동을 많이 요하는 시기에는 밤에 활동(勞動)을 해야 하는 경우 불에 의존해야 하는데 기름이 없었던 시대에 달은 여간 고마운 존재가 아니었다. 이러한 연유로 한 달에 한 번 만월을 이루는 보름달은 신성시 여겨졌고, 매 달의 만월 중에 8월 15일 만월은 일 년중 가장 큰 만월이라서 그 만월 아래서 달의 고마움에 축제를 열게 된 것이 추석의 유래로 전해진다.
추석의 명칭은 한가위, 중추절 또는 추석으로 칭한다. 중국에서 음력 8월 15일을 중추(中秋) 또는 추중이라 했는데 한자 성행과 함께 유래 되었다는 설과 칠석, 월석이란 명칭을 본 따서 추석이라 불려지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또한 한자로 추석(秋夕)은 추수를 마무리하는 절기라는 뜻이 있다. 1년을 위하여 수고한 결실을 거두는 절기라는 말이다.
추석의 다른 이름은 한가위(嘉俳-가배) 이다. 한가위란 말은 한은 대정 제일(大正第一) 즉 제일 큰 하나라는 의미이고, 가위란 말은 가배(嘉俳), 가배일(嘉俳日), 가뷔란 말과 동일어로 ‘중앙’을 뜻한다. 그래서 한 가위란 말은 ‘1년 중에 가장 큰 보름날’ 이라는 의미이다.
신라 제 3대 왕 유리왕(儒理王) 9년 (A.D. 32년)에 왕은 6개 마을(六府)을 선정하고 왕녀 둘을 선정하여 두 편으로 나누어 7월 16일부터 8월 15일까지 길삼(베짜는 일)대회를 하여 승패를 가렸다. 베를 많이 짜서 이기는 편에게 적게 짜서 지는 편은 밥과 술을 음식을 장만하여 사례하였다. 그리고 그 공력이 많고 적음을 가려서 사례하고 누구나 마음껏 먹고 즐기도록 했다.
그 날은 너나 할 것 없이 빈 한 자나 부 한 자나 귀족이나 천족이나 함께 어우러져 즐기는 날이므로 백성들에게는 지상 낙원 같은 날이었기에 ‘항상 한가위 같았으면 족하다’는 말을 미련사(未練謝)로 남아 전래 되었다.
추석에는 성묘를 한다. 성묘란 묘를 살핀다는 뜻인데 민속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나라 민속 신앙은 동양의 3대 종교 불교(佛敎), 유교(儒敎), 도교(道敎), 사상에서 형성되었다. 불교의 범신(凡神) 사상과 자연신(自然神) 사상, 유교의 신선(神仙) 사상은 비슷하다. 특히 도교 영항을 많이 받았는데 공자 맹자 순자로 형성된 유교는 체계가 있어서 양반 종교라 지배계층, 소위 지성인들의 종교 즉 양반종교(兩班宗敎)로 자리 잡았고, 도교는 체계가 없는 종교로 산골이나 어촌으로 들어와 상민종교(常民宗敎)로 가지각색의 모형으로 변형되어 민속신앙(民俗信仰)이 되었다.
성묘의 사상은 유교의 효(孝)사상에서 나왔으나 종교 행위는 도교의 영혼 숭배 사상으로 발전하였다. 도교에서는 인간의 죽은 영혼이 거하는 곳이 옥황상제(玉皇上帝)의 영역인 구천(九天)에 속한 무덤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도교를 섬기는 대만을 가면 무덤을 현실의 가옥 같이 잘 꾸며 놓았고 음식도 최대한 잘 차려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죽은 영혼을 마치 현실의 삶처럼 이해하고 접대하는 것이 효도라는 사상에서 성묘가 발전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묘를 쓰는 시대를 넘어 공동묘지로 그리고 납골당으로 전환 되어 가는 시대적 변환기에 살고 있다. 그러기에 성묘의 의미가 점점 옅어지고 있다. 세상을 떠나 만날 수 없는 부모를 찾는 성묘보다는 그 정성으로 살아계신 부모님을 한 번 더 찾아뵙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노부모, 병든 부모에게 무관심하면서 무덤 앞에 음식을 차려 놓고 절을 하는 성묘는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글 이상희 수석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