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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 조회 2171 | 2018-01-20 10:12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제목에서 언뜻 느껴지는 분위기가 가볍지 만은 않아서 심야시간대에 보기 좀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시간대가 맞는 다른 영화가 없었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김윤식, 정우성, 하정우, 강동원, 유해진 등 한국영화 일급 배우들이 10 여명 이상 등장하는 초호화캐스팅 영화이다.
때는 1987년 4.13 호헌 선언으로 전두환 군사정권이 임기 말을 앞두고 대통령직선제 실시를 철회하고 호헌을 강행하려했다. 그러자 전국에서 대학생과 일반시민들까지 합세한 대규모 호헌 철폐 시위가 연일 벌어지고 있는 혼란이 극에 달한다. 같은 해 5월 시위에 가담한 남자 대학생 하나가 남영동으로 끌려가 고문실에서 죽어나가는데 대공수사본부에서는 이를 은폐하려고 사건을 조작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사건으로 죽은 학생은 바로 서울대생 고 박종철 군이다. 그의 죽음은 당시 노신영 총리와 장세동 안기부장을 사퇴시키면서 전두환 사후보장파가 퇴조하는 정국을 불러왔다. 영화는 이 과정을 줄거리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대공수사본부장 역할의 김윤식은 완벽한 북한 사투리와 골수까지 반공산주의자로 완벽하게 빙의하여 소름 돋는 연기를 선보였다. 김윤식 배우의 매력은 잘생긴 외모도 아니고 섹시한 몸매는 더더욱 아니고 자기가 맡은 배역을 완벽하게 소화하는 점이다. 그 점에 있어서는 유해진 배우도 마찬가지이다. 누나 집에 얹혀살면서 인정 많고 숫기 없는 노총각 역할을 마치 태생부터 그런 냥 천연덕스럽게 해낸다. 하지만 실상은 누나와 갓 대학에 입학한 조카의 든든한 보호자이다. 또한 교도소 간수로 재직하면서 교도소에 수감된 반체제인사와 외부와의 연락책으로 극에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핵심적인 역할을 맡아 열연하였다.
극중반부에 대학생 시위현장에서 갑자기 시위주동자(고 이한열 열사)로 깜짝 등장한 강동원은 여성관객들의 탄성을 불러 일으켰다. 사십이 코 앞 인데 아직도 풋풋한 대학생 역할이 참 잘 어울렸다. 파트너로 나온 여배우는 송혜교의 리즈시절을 연상시키는 김태리, 화장기 없는 청순한 미모로 역시 여대생 역할을 잘 소화하였다.
시위현장에서 도망치면서 운동화 한 짝을 잃어버린 서로에게 새 운동화를 선물해 주는 장면이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애잔한 영상으로 기억에 남는다. 가지런히 놓여 있던 하얀 새 운동화에 마치 그네들이 피흘려가며 아니 죽어가면서까지 꿈꾸던 새로운 세상을 향한 소리 없는 염원이 담긴듯하여 더욱 뇌리에 진하게 남는다.
그 해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희생자 추모집회에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전두환 정부에 의해서 은폐· 조작되었다는 특별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를 기점으로 전국에서 민주화시위물결이 봇물처럼 터지기 시작하여, 1987년 6월 10일 이후부터 19일 동안 전국 30개 도시에서 연인원 4~5백만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가 이어졌다. 마침내 노태우 전 대통령의 6·29선언을 이끌어 냄으로 호헌철폐와 대통령 직선제가 이루지게 되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새로운 세상은 대(大)를 위해 소(小)를 희생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열리는 이치를 곰곰이 되짚어보게 하는 이야기였다. 다소 무거운 주제였지만 동 시대를 살면서 함께 아픔을 겪어내었던 우리 모두의 이야기인지라 더욱 생생하게 마음에 와 닿았고 깊이 공감하면서 볼 수 있었던 좋은 영화였다.
글 이상희 수석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