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수필>‘자출사는 나의 브랜드’ | 문화
관리자 | 조회 2085 | 2018-06-01 19:33
열렬히 자전거를 타는 남자!
오. 늘도 내일도
충. 실히 그리고
열. 렬히 자전거를 타는 남자!
아는 지인이 이름을 가지고 삼행시를 지어주었다. 삼행시에 자전거가 들어 있다. 나를 생각하면 사람들은 자전거가 떠오르나 보다. 나를 떠오를 때 근사한 포르쉐 같은 멋진 스포츠카 같은 고급스런 이미지를 떠올리면 좋겠지만, 자전거가 생각나다니... 그만큼 자전거와 내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브랜드는 자출사다. 자출사는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사람을 말한다. 자전거로 출퇴근 뿐 만 아니라 장도 보고 아이들과 함께 놀기도 하고, 업무도 보니 거의 자전거 생활자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이야 ‘자출사’란 말을 아는 사람이 꽤 있는데 예전에는 ‘자출사’가 뭐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많았다.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그때서야 아! 하며 “자전가 타세요! 낭만적이다~”라고 말한다. 사실 자전거 타는 게 그리 낭만적이지 않는다. 자출사를 한지는 십년이 넘어 간다. 왜 그렇게 자전거를 타고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많다. 이유는 없다. 그냥 탄다.
누구나 어렸을 때 자전거를 배운 기억이 가지고 있다. 대부분은 쉽게 배우진 않았을 것 같다. 나 역시 자전거를 배우는데 혹독한 댓가를 치러야 만 했다. 7살 때로 기억하고 있다. 집에 큰형이 타고 다니던 큰 짐발이 자전거가 있었다. 키도 작았던 나는 그 큰 자전거를 아래에서 위로 올려 다 보아야 했다. 무슨 욕망인지는 몰라도 그 자전거 위를 올라타고 싶었다. 키와 힘도 허락하지 않았지만 타고 싶었다. 당시에 키가 작았던 또래 아이들은 바로 안장에 앉아서 타지 못하고 일명 '가랭이 타기'로 먼저 자전거를 익혔다. 나 역시 가쟁이 타기로 먼저 자전거를 배웠다. 가랭이 타기는 자전거의 중앙 삼각형 대 사이로 다리를 넣어 굴려서 가는 방법이다.
자전거의 위쪽도 아니 중간 사이에 다리를 넣어 굴리고 몸은 한쪽으로 치우쳐서 있고 지금 생각하면 그게 더 어려운 것 같다. 그렇게 타라고 하면 탈 수도 없을 것 같다. 멀리서 보면 마치 묘기를 하는 듯 한 모습 같다. '가쟁이 타기'가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드디어 안장에 앉아서 탈 수 있는 기회가 온다. 가쟁이 타기로 어느 정도 평형감각을 익힌 다음에 본격적인 자전거 타기에 들어가는 것이다.
자전거를 처음 배울 때 동네 형들이 균형을 잘 못 잡으니까 뒤에서 잡어 주었다. 나는 엉덩이를 삐뚤삐둘 하면서 굴리며 가고, 뒤에서 잡아주면 자전거는 균형을 잡고 나아갔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 또 올라가고 잡아주고 그렇게 하기를 몇 회 인지 모른다. 어느 정도 균형을 잡았다 싶어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앞으로 가다보니 왠지 느낌이 이상했다. 그렇다. 형들은 두손을 놓고 웃으면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형들이 잡고 있지 않다는 불안감에 급격하게 균형은 흔들렸고 심하게 흔들렸고 "어어~~"하면서 균형을 잃고 또랑에 빠졌다. 크게 다치진 않은 것 같아 일어났지만, 허벅지가 아파왔다. 그 쪽을 보니 심하게 부어올라 있었다. 그 때 생긴 상처는 내 허벅지 한켠에 자리하고 있다. 지금에 영광의 상처가 그 때 생긴 상처다. 형들은 이런 걸 한 번 겪어야 자전거에 대한 무서움도 사라지고, 뭐든지 다 해낼 수 있다고 했다. 그렇게 난 자전거와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그 때 맺어진 자전거와의 인연은 지금까지 자출사로 이어지고 있다. 자전거 위 안장에서 바라본 세상은 사뭇 달랐다. 높았고 멀었다. 말타기와 차타기 중간에 자전거타기가 있다. 높지도 낮지도 않다. 자전거 위에서 바라본 세상은 아름다웠다.
나는 출퇴근을 목적으로 자전거를 이용한다. 일상적으로 자전거를 타다보니 내 얼굴에는 점과 주근깨가 더 이상 자리 잡을 곳이 없을 정도다. 거무튀튀한 바탕에 참깨 몇 개 뿌려놓은 것 같다. 자전거를 타면 어쩔수 없이 외모는 버려야한다. 하지만 자전거를 계속 타고 있다. 햇볕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탈 뿐이다. 왜 타냐고 물으면 자전거가 거기 있고 그냥 탈 뿐이다.
전주시평생학습관 오충렬